파리 패션위크가 끝나고 사흘째 되던 날, 마레 지구의 한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. 런웨이에서 본 것들이 이미 거리 위에 있었다. 아니, 정확히는 반대였다. 거리에 있던 것들이 런웨이 위로 올라갔다. 그 경계가 무너진 것이 이번 시즌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.
에르메스는 탈레 와즈루가 디렉팅한 세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다. 장소는 그랑 팔레가 아닌 파리 19구의 한 공원이었다. 모델들은 풀밭 위를 걸었고, 관객들은 소풍용 담요에 앉아 컬렉션을 감상했다. 의도적인 격식의 해체였다. 그러나 옷은 어느 때보다 공들여 만들어진 것들이었다. 맥락은 편안했지만, 내용은 정밀했다.
생 로랑은 반대의 길을 택했다. 앤토니 바카렐로의 쇼는 에펠탑 아래 야외 무대에서 밤 10시에 시작됐다. 스포트라이트, 전자음악, 그리고 모델들의 당당한 보폭. 패션을 스펙터클로 재정의하려는 선언이었다. 호불호가 갈렸지만, 누구도 외면하지 못했다.
꼼데가르송은 여전히 꼼데가르송이었다. 레이 가와쿠보는 설명하지 않는다. 쇼 노트는 한 줄이었다. “형태는 감정이다.” 모델들이 입고 나온 것들을 옷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, 그것들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. 무엇인지는, 각자가 결정해야 했다.
이번 시즌 가장 많이 회자된 순간 중 하나는 마리옹 코티야르가 발렌티노 쇼 프론트로에 앉은 장면이 아니라, 쇼가 끝난 뒤 나눈 피코 구아단치노와의 대화 장면이었다. 패션위크는 이제 옷만의 축제가 아니다. 영화, 음악, 건축이 교차하는 문화의 교차점이다.
한국 디자이너들의 존재감도 달라졌다. 정혜경의 레이블 ‘헤크(HECK)’는 파리에서 두 번째 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. 서울에서 가져온 미감—무채색, 직선, 그리고 기능적 디테일—이 파리의 평론가들에게 신선하게 읽혔다. “서울은 더 이상 파리를 참조하지 않는다”는 평가가 나올 만했다.
스트리트에서는 다른 드라마가 펼쳐졌다. 패션위크 기간 동안 파리는 전 세계 패션 에디터와 인플루언서들로 가득 찼고, 그들의 옷이 또 다른 런웨이를 형성했다. 팔레 루아얄 앞, 루이비통 재단 앞, 튈르리 공원 안. 어디서나 촬영이 이루어졌다.
패션위크가 끝나고 파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. 하지만 그 일상 위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얹혔다. 이번 시즌이 남긴 것은 특정 트렌드가 아니라, 패션이 삶과 합쳐지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다. 그 상상력이 어디로 이어질지, 9월이 기다려진다.